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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참사 (건물붕괴사고 사망자 세계 2위 사건)

by 궁딩 2021.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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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7분

 

지하5층 ~ 지상4층 규모의 백화점 A동 한 동이 10초만에 무너져버린 사건입니다.

 

사망 502명, 실종 30명, 구조 40명, 부상 937명으로

 

약 1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약 2700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삼풍백화점 사고에 동원된 인력은 약 68600명이며,

 

크레인, 덤프트럭 등 약 2400대가 동원되었습니다.

 

 

 

2013년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 이전까지는

 

세계 건물 단독 붕괴 참사 사망자 1위였습니다. (현재는 2위)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 사망자 1129명, 부상자 2500명이상)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전


삼풍건설산업의 창업주 이준은 건설사업으로 모은 자본을 바탕으로

 

삼풍아파트와 삼풍백화점을 건설했습니다.

 

원래 삼풍백화점 부지는 주거용이라 백화점은 지어질수 없는 자리였지만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 용도를 변경하여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삼풍백화점 개점행사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초구 서초동은 강남 한복판의 핵심 지역이었고,

 

서초동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주하던 부자들은 자주 들르는 장소였습니다.

 

부실공사


원래 삼풍랜드라는 이름으로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되어

 

우성건설에서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완공에 가까워 질 무렵 건축주인 이준은 건물용도를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우성건설에 원래 4층이었던 설계에 1층을 더 얹어

 

도합 5층으로 건물을 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우성건설은 붕괴위험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이준은 결국 우성건설과의 시공계약을 중도에 파기시키고

 

삼풍건설산업이 시공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무량판 구조는 설계상엔 문제가 없었으나,

 

실제 시공에서는 지판 두께도 충분하지 않았고,

 

일부 기둥은 지판 자체가 없어서

 

바닥과 기둥의 철근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둥들의 지름을 25% 정도 깎기도 했으며,

 

몇몇은 용도에 따라 없애버렸습니다.

 

기둥속 철근의 개수도 절반으로 줄여버렸습니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습니다.

 

준공 승인을 받은 후에 개점을 할 수 있는 원칙을 그대로 무시해버렸습니다.

 

 

 

부실관리


불법 증축으로 추가된 5층가벼운 롤러장을 설치할 예정이었지만 식당가로 변경되었고,

 

이 때문에 무게가 상당한 물건인 냉장고, 주방기기,

 

앉아서 밥을 먹는 식당 구성에 온돌 난방시설까지 설치하였습니다.

 

추가로 2층에는 삼풍문고를 입점시켰습니다.

 

(최근 백화점 푸드코트나 서점들이 대부분 지하나 저층에 있는 이유도 삼풍백화점 사고 때문입니다.)

 

 

 

결정적 사고원인 옥상 에어컨 냉각탑


부실시공, 부실관리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붕괴원인

 

옥상의 에어컨 냉각탑이었습니다.

 

이 냉각탑은 옥상에 3대가 있었는데 무게만해도 합 36톤이며,

 

냉각수까지 채우면 87톤이었고, 이 무게는

 

삼풍백화점 옥상이 견딜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무게였습니다.

 

그런 냉각탑을 가만히 놔둬도 무리가 가는 와중에,

 

삼풍백화점 옥상 동쪽에 설치되어 있던 냉각탑의 소음

 

인근 삼풍아파트 주민들에게 민원을 너무 많이 받는 탓에

 

냉각탑들을 반대편 우면로 도로측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런 무거운 물건은 건물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크레인을 사용하여 한번에 옮겨야 하지만,

 

백화점측은 이동 비용을 줄이기 위해

 

냉각탑 아래에 롤러를 장착하여

 

옥상 상판 위에서 천천히 끌어서 옮기는 방법을 써버렸습니다.

 

한 대당 12톤이나 되는 무게가

 

옥상바닥과 지지구조물에 엄청난 압력과 충격이 가해졌습니다.

 

전조현상


하루전 촬영된 옥상사진. 1995. 6. 28.

 

옥상의 펀칭현상이 나타나는 모습.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붕괴징조)

 

 

하루전 촬영된 식당가 사진. 1995. 6. 28

 

하루전 촬영된 식당가 사진. 1995. 6. 28

 

천장과 바닥이 침하되어 탁자가 기울어진 현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

 

 

사고 당일 (6월 29일)


사고 전날 옥상과 식당가에 나타난 증상들을 목격 후,

 

사고당일인 6월 29일 대책이라도 짜기위해

 

경영진이 안전진단 및 대책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오전 9시, 5층의 전주비빔밥 전문점 주인은

천장과 바닥에 균열을 보고 한 후 시설부의 권유로 휴업에 들어갔습니다.

 

오전 10시, 우동전문점과 냉면전문점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

콘크리트 부스러가기 음식에 떨어지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낮 12시,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지시켰습니다.

 

오후 12시 30분, 건축설계사가 5층 식당가와 4층 귀금속 코너의 대피를 건의했고,

5층 대부분의 점포와 4층 귀금속 코너의 영업을 중단시켰습니다.

옥상의 냉각탑 작동도 중단하고, 냉각탑의 배수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사고 당일이었던 6월 29일은 29도씨의 기온으로 무더운 날씨였는데

냉각탑이 중단되는 바람에 순식간에 찜통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쇼핑을 멈추고 더워서 백화점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운좋게 참사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3시에 구조기술사와 백화점 임원진은 안전진단을 실시하였고,

오후 4시 2차 긴급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때, 속히 영업을 중단하고 긴급보수를 해야한다고 경영진에 보고를 하지만,

이준은 경제적 피해를 생각하여 반대했습니다.

 

결국 대책회의에서는 영업중지 없이 보수공사로 해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버렸던 것입니다.

 

경영진이 붕괴징조를 알고 미리 백화점을 빠져나갔다는 루머


언론의 오보로인해 퍼진 이 루머는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붕괴 징조는 발견했지만 당장 붕괴가 될것이라고 생각은 못했고,

 

붕괴 바로 직전까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경영진들은 붕괴시점에도 대책 회의를 하느라 백화점 건물에 있었으나,

 

회의실이 무너진 A동이 아닌 무너지지 않은 B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은 붕괴현장을 확인하고

 

넋이 나간 채 서있다가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습니다.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30초 후 찍힌 사진

 

 

 

옥상과 5층부터 1층의 바닥면이 샌드위치처럼 쌓여 무너진 모습.

 

외부의 충격없이 저런 형태로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북한에 의한 테러 가능성을 영국 언론에서 주장하기도 했는데,

 

부실공사로 밝혀져 더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3년 청주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부실공사),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광주 남구 봉선동 대화아파트 붕괴사고 등 처럼

 

폭발 충격으로 인한 붕괴가 아닌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처럼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였습니다.

 

 

 

악마의 미소


붕괴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많아서 나온 기사에 나온 사진입니다.

 

붕괴 당시 절도로 입건된 사람이 무려 400여명에 달했습니다.

 

구조본부에 자원봉사자로 지원 후

 

자원봉사 물품 및 백화점 물건 무단 절도를 일삼는 사례도 발견되어

 

구조본부는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인력으로만 구조대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구조작업


 

이런 큰 유래없는 재난에 구조작업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난을 대비한 컨트롤 타워가 없었고,

 

청와대가 개입하여 소방본부가 현장지휘를 하게 하였으나,

 

여러 불협화음들이 속출했습니다.

 

 

붕괴 매몰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재의 열기소방수 때문에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습니다.

 

70여시간만에 구조되었으나 화상을 입은채로 이송 중 사망한 사람과

 

소방수에 익사한 사람이 있는 반면,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여 생존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실종자 집계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발견되었을때

 

팔 2개 + 다리 2개 + 머리 + 몸통 = 시체 1구로 인원을 추산하여

 

언론 보도하기도 했다가 정정되었습니다.

 

붕괴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에서

 

시신 142구를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방송사의 현장취재경쟁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갇혀있던 생환자가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 실명케 돼 담요로 감싸고 있다."고 말하면서

 

화면에는 생환자 얼굴에 눈부신 조명을 비춘다거나,

 

산소가 부족한 비좁은 공간까지 취재진들이 들어오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 구조대원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최후의 생존자 3인


최명석 (남 1975년생 당시 21세, 11일만에 구조)

- 매몰 중 장대비 덕분에 빗물로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유지환 (여 1977년생 당시 19세, 13일만에 구조)

- 같이 매몰된 직원들과 대화를 하며 버텼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신 혼자만 살아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박승현 (여 1976년생 당시 20세, 17일만에 구조)

- 최후의 생존자

 

 

 

사건 이후 이준


이준 회장은

 

"여보쇼.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

 

라는 망언을 남겼습니다.

 

이준은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원칙하에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습니다.

 

2003년 4월 만기출소 그 해 10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언론보도


 

 

붕괴사고 이후


1995년 9월에 붕괴된 A동의 잔해가 철거되었고,

 

B동은 3년 넘게 남아있다가 1999년 1월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해당 부지인 서초동은 강남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 중 한 곳이라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부지를 2052억 4300만원에 낙찰 받아

 

2004년에 아크로비스타라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참사 위령비는 참사가 일어났던 지역에 지으려 했으나,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양재 시민의 숲에 지어졌습니다.

 

 

89년 항공사진(좌)과 96년 항공사진(우) B동만 남아있는 모습

 

현재 아크로비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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